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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terotopia
사랑 예찬 - 알랭 바디우

 

 

 

알랭 바디우는 사랑을 두 사람이 만나 진리를 얻는 경험이라고 보았다. 두 사람은 우연한 만남을 통해 관계를 시작한다. 둘은 서로 간의 존재론적 차이를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장애물을 지속적으로 극복해가며 둘 만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한다. 흔히 우연에서 필연으로 말하듯이 사랑은 우연으로부터 지속성을 이끌어낼  비로소 항구적인 신세계, 진리에 도달할  있게 된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은 이해관계에서 해탈해 있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사랑은 자본주의에서가 아니라 공산주의에서 진정으로 싹틀 수 있다(81). 바디우는 사랑은 최소한의 코뮤니즘(98)이라고까지 보았다. 또한 사랑과 정치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며, 정치적 입장에서 오는 차이는 사랑에 결부될 없다고 했다. 우리는 정치에서 타협 불가능한 적과 마주치는데, 적과 사랑은 공존할 없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차이와 사랑이 강하게 연결되었다고 서술한 것과는 모순적으로 정치적 문제는 증오를 통제하는 문제이지 사랑의 문제는 아니(79)라며 정치적인 면에는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공산주의 운동가로서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온 세월이 그를 단언하게 만든 듯 하다.

 

 

한편, 사랑의 적은 외부가 아니라 오히려 내부에 있다(71). 바로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통해 구축되는 세계에 반하여 동일성을 강요하려 하는 이기심이다. 두 사람이 하나로 융합하는 급진적 사랑은 세계의 밖에 존재하는 예술적 차원의 사랑이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한다(42). 현대에 흔히 낭만화 되는 이러한 사랑으로는 진리가 존재하는 세계에 도달할 수 없다. 이 지점이 연인관계를 포함한 많은 인간관계가 실패하는 이유  하나일 것이다. 정서적으로 가까워진다고 해서 실존에서 오는 필연적인 이질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쉽게 간과하곤 하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며 융합된 세계를 강요하려는 마음을 경계해야 한다.

 

 

또한, 바디우는 사랑에서 위험을 제거하려는 현대 시류를 비판한다. 사랑에 위험은 늘 도사리며 이를 제거하는 것은 환상에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한국인으로서는 긍정하기 어렵다. 한국에서 여성은 대략 열흘에 1명씩 남성 파트너에게 살해당한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은 UN에서 요구하는 ‘파트너 폭력’에 대한 공식 집계를 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여성들이 파트너에게 살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랑에 따르는 실재적 위험이 크든 작든 당사자인 여성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늘 큰 위협을 상정해야 하고, 무거운 위험일수록 여성이 감내해야 할 확률이 높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살해당한 그 어떤 여성도 최초의 ‘우연한 만남’에서 큰 위협을 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랑을 구축하기로 마음먹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현실이 이러한데 사랑의 진리를 알기 위해 위험을 안고 가야 한다는 주장은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내는 데에 있어 상당히 낙관적인 공상으로 들린다. 관계의 단절 같은 좁은 의미에서의 ‘위험’만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살인, 자살 등 경도 높은 위험도 그 ‘위험’들 중 하나라고 소개한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자라면 지나치게 낭만화되고 왜곡된 오늘날의 사랑의 개념을 지각하고, 진정한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책이다.

 


융합하는 세계보다는 낮은 단계이긴 하지만 자신만의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로 이행해야 한다니 너무.. .. . . .거부감 듬. 저의 세계는 지금으로도 나름 완벽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사랑을 못하는 이유를 이해시켜준 나름 좋은 책인 듯 함. 도움이 되었어요 bb

 

 

*독서모임에서 읽음

2021.8.31

yunic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