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de
heterotopia
알랭 로브그리예 - 질투

 

2018년 4월 27일 | 독서모임 | 도서관대출

 

이 소설은 오로지 화자의 객관적인 상황묘사로만진행된다. 화자는 내용전개와 전혀 상관없는 집에서 보이는 바나나 경작지의 나무 개수라던가 난간의 페인트칠이얼마나 벗겨졌는가 하는 것에 대해 반복적으로 아주 집요하게 묘사한다. 수학적인 용어를 사용해가며 집요하게사물을 묘사하는 것에서 화자의 자폐적이고 집착적인 정신상태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관찰의 시선은 작중내내 아내인 A를 따라다닌다. 작중에서 어떠한 심정의 묘사도등장하지 않지만 아내인 A와 이웃집 남자인 프랑크의 사이를 끊임없이 감시하는 시선에서 화자의 질투의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불어 Lajalbusie는 창문에 치는 블라인드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중적인 의미의 제목은 질투의감정을 가지며 블라인드 틈새로 아내를 감시하는 화자를 잘 나타낸다.

라는화자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는다. 화자의 존재는 오로지 관찰의 시선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독자는 화자의 존재를 화자의 몫인 컵과 의자 등에서 추측해야 한다. 독자는화자가 시선으로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주인공인 화자의 개성이 오로지 질투 뿐인 것처럼 느낀다. 질투의시선 말고는 화자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프리카에 거주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시선으로서만특징지어진 화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더욱 화자의 질투의 감정에 몰입할 수 있다.

 

또한, 이야기는 시간단위로 진행되지 않는다. 행동과 장면의 불규칙적인 연속에서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란 어렵다. 작중의 시간적 배경은 소설의 맨 마지막을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직접제시되지 않는다. 다만 그림자의 위치, 사방의 밝기, 인부들의 작업 진행 상황 등으로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방식의 이야기 진행은 하루하루가 똑같이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과 그 안에서 아내와 분리되어 부유하는 화자의 존재를 잘 나타낸다.

아내와 화자의 사이는 좋다고 할 수 없다. 화자 몫의 의자를 마주볼수 없도록 돌려놓는다거나 은근히 부엌으로 내쫓는다거나 귀가하자마자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는 묘사에서 둘의 사이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화자는 자신을 외면하고 프랑크와 가까워지는 아내를 가만히 관찰할 뿐이다.

 

영화 감독으로도 활동하는 알랭 로브그리예는 영화에서 누보로망 작가들을열광시키는 것은 카메라의 객관성이 아니라 전혀 객관적이지 않은 것, 상상에 지나지 않는 것을 명백한객관의 외형으로 제시할 수 있는 카메라의 가능성 이라고 했다. 그렇다면이 소설에서 화자의 상상인 부분은 어디일까. 처음부터 끝까지 화자의 진술로만 진행되는 동안 독자는 끊임없이화자의 진술이 객관적인 것인가 아니면 주관이 개입한 시선인 것인가 판별하게 된다.  화자의 서술은 객관적인 동시에 주관적이다.어디까지가 주관이고 객관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독자는 프랑크의 차가 나무에 부딪혀화재를 일으키는 서술의 다음 장면으로 멀쩡한 차를 타고 A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것에서 차 사고가화자의 상상의 영역에 속하지 않을까 추측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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